문헌에 나타난 전주화약(全州和約)의 허구성
-전주화약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은 재고되어야 한다.-
2015. 3. 3일에 정한 6월 11일(음력 5월 8일) 전주화약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은 재고해야한다.
전주화약은 관민상화 원칙하에 전봉준과 초토사 홍계훈이 폐정개혁을 약속하고 농민군이 해산을 함으로써 농민자치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하나,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함으로써 승승장구하던 혁명군의 기세가 정체되어 결과적으로, “전주성을 점령하고 지체 없이 서울로 진격한다”는 사발통문 혁명계획을 와해시켜 혁명의 실패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농민군이 전주성에서 철수 한 동기는, 잘 알려진 대로, 농민군 주력이 전주성에 고립되어 강력한 경군의 화력 앞에서 수성이 어렵다는 것, 청. 일 양국군의 파병으로 인한 국가 위기 정국의 조성, 농번기인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문헌에 나타난 전주화약의 자료를 검토해보면 전주화약이 혁명 기념일로서의 의미를 갖기에는 큰 문제점을 갖고 있다.
전주화약은 농민군과 초토사 홍계훈이 폐정개혁안을 상주하고 농민군의 안전 귀가의 신분보장을 조건으로 1894년,5월 8일(음)에 체결했다고 한다.
그러나 귀화(歸化-귀순)하면 살려주는 것은 동서고금의 공통된 전투규범으로 하나로 이것만을 화약의 조건으로 볼 수 없다.
또, 전주 화약 9일 후인 5월 17일에 순변사 이원회에게 호남회생등상서(湖南會生等上疏)를 올려 귀가하는 농민군을 도륙한 수령의 행패와 안전한 귀가 보장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비난하고 폐정개혁안을 다시 올린다. 이것은 폐정개혁안을 상주한다는 홍계훈의 당초의 약속이 이행되지 않은 것이며 폐정개혁안이 시행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정부가 동학농민군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전주화약이 체결된 5월8(음)일자 초토사 홍계훈이 공사청(公事廳)에 보낸 다음 전보 보고 내용을 보면 화약체결이라는 표현이 민망할 정도로 정부의 일방적인 강경책에 의한 해산이었다. 해산한 농민군에 대한 탄압도 계속된다.
공사청에 보낸 전문에 의하면 “적도들이 여러 번 패한 후 사나운 기세가 꺾여 귀화를 호소하는 상황이나 의도를 알 수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또 적도가 매우 많고 성벽은 견고하니 적을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적도들이 동문과 북문으로 도주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오전 10시경에 300여개의 사다리를 성에 세워 병사들이 성을 넘어가 남문을 열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한편으로는 공격하고 하편으로는 도망치는 자를 쫓아갈 때에 적도들이 동문과 북문을 나와 머리를 감싸고 사방으로 흩어지니 대부분 총상자 들이었습니다. 모두 잡아들이라고 각 읍에 명령하고 몇 부대를 파견하여 추격 섬멸할 계획입니다. 지난번에 잃어버린 크립프 대포 1좌, 개틀링포 1좌, 실탄과 각 읍에서 탈취한 군용품, 총, 창 천여 자루와 불랑기 포 24좌, 납 탄환 10말, 화약 천근과 기타 활, 화살, 갑옷, 투구, 군도 도끼는 모두 걷어 모았습니다. (중략)...
내서로부터 어제의 전보에 하답하기를, “보내온 전보의 뜻은 잘 알았다. 사다리로 성을 오르는 일은 매우 경솔한 것이었다. 적의 정세를 상세히 탐지하고 성문을 몰래 격파하여 성을 회복하라. 평양의 영병이 곧 도착할 것이니 힘을 합쳐 하루빨리 섬멸하고 불을 지른 뒤에 청군이 전진하는 일이 없도록 속히 도모하라.” 8일 해시(亥時, 오후 9∼11시)”라고 하였다. [양호전기 5월8일자]
(원문)
甲午五月初八日甲申
電報 公事廳曰賊徒自累敗後銳氣挫縮雖有呼訴之狀而連乞
歸化其情叵測不可準信且徒黨夥多城堞厚完不可輕敵另加
商量之際聞賊徒有從東北兩門流逃云故當日巳時量造得三百
餘梯弔立城外令兵丁一齊越城洞開南門領軍入城一邊攻擊一邊
逐北之際賊徒從東北門抱頭四散皆是中丸被傷者也這這捉納之
意另飭列邑又派送幾隊兵追躡剿滅計料向失克虜伯一坐回旋
砲一坐彈丸及各邑所奪軍器銃與槍千餘柄狒狼機大砲二十四
座鉛丸十斗火藥千餘斤其餘弓箭甲冑刀斧竝皆收還移文 ......
自內署下答昨日電曰來電悉雲梯登城甚
踈忽詳探賊情破開城門暗破復城箕營兵今明可到合力不
日剿滅焚後可無淸兵前進速圖八日亥時
결국 농민군은 초토사의 위계에 속아서 해산을 한 것이다.
또, 전주성에서 철수한 농민군 일부는 해산하지 않고 전열을 정비하고 재봉기를 준비한 것으로 봐서 전주화약이 내부의사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짐작 하게한다. 전라감사의 보고 등 다수 문헌에서 해산 후 농민군의 활동이 나타난다.
전라감사
어제 김제의 보고를 받아 보니, “비도 700~800명이 깃발을 들고 포를 쏘며 창과 칼을 지니고 읍내에 들어와서 머물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안의 보고를 받아 보니, “어제 신시(申時)에 비도 몇 천 명이 동진 나루를 건너 대요, 석교 등지로 향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순변사·초토사와 함께 의논을 하였습니다. [동비토록]
(원문) 完伯
昨見金堤所報匪徒七八百名建旗放砲鎗劍直入邑底留宿云云
見扶安所報昨日申時匪徒幾千渡東津向大腰石橋等地云方與
巡邊招討共議 完伯
기념일 제정을 두고 10여 년간 첨예한 주장과 논리가 대립되면서 지역이기주의라는 비판에 매몰되어 숭고한 동학농민의 정체성과 상징성을 대표하는 가장 바람직한 기념일 제정이 표류되어 왔다.
기념일 제정을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여론과 정부의 압력에 밀려서 그동안 지역갈등을 유발했던 대상일은 전면 배제하고, 서둘러 전주화약일로 결정, 추진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고육책을 이해한다.
그러나 재단에서도 자인하듯이 최선책이 아닌 차선책으로 그간 한 번도 거론되지도 않은 혁명의 상징성이 없는 전주화약일 기념일은 부적절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은 반드시 전쟁을 수반한다. 따라서 혁명의 대표적 상징성은 전투에서 찾는 것이 합당하다.
전주화약은 혁명군의 해산이라는 면에서 혁명의 상징성이 없다.
자손만대 대대손손 계승하고 선양할 숭고한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만에 하나 전주화약일이 된다면 두고두고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기념일 제정이 시급을 요하고 지역갈등을 피하는 것이 중요할지라도, 그것이 숭고한 동학농민혁명의 상징성을 떨어트리는 기념일 제정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전주화약 기념일이 지역갈등을 해소하는 완전한 해법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제정 방법과 절차의 객관성, 공정성에도 많은 논란을 빗고 있다.
10여 년간 기념일 제정을 둘러싸고 야기된 논쟁과 갈등은 꼭 소모적인 것만은 아니며,
지역 간의 다른 논리와 주장의 충돌로 인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 제고와 연구의 성과라는 생산적 요소도 있었다고 본다.
그것이 애향심의 발로였든지, 지역이기주의의 충돌이었든지 간에.
그러한 지역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으로는, 외면하고 비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적극적인 해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제는 10여 년간의 쟁점을 생산적 결실로 마감하여 차분하고 냉정하게 혁명의 성격과 상징성이 가장 대표성을 갖는 기념일을 도출해 내는 해법을 찾아야한다.
오랜 기간의 진통과 산고 속에서 탄생할 혁명 기념일은 차선이 아닌 최선의 선택이 되어야한다.
대다수가 수긍하고 동의하는 기념일을 정하기 위해서 전국적인 관련 연구자, 전국의 각급, 국사 교수, 교사들의 설문조사를 통한 여론 수렴 방법을 채택하고 공청회 등의 방법도 생각해야 한다.
정읍 동학농민혁명 유족 유 태 길
참고문헌 : 양호전기, 동비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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