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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들…  |  19-07-30  |  41,396
전봉준 장군, 이제는 죄수 아닌 장군의 모습으로 복권되어야 한다.
   전봉준 장군.hwp (1.1M) [18] DATE : 2019-07-30 17:34:44
한 시대를 이끌었던 영웅, 전봉준 장군의 모습은, 황토현의 동상, 그림, 드라마, 만화 등에서 한결같이 맨 상투의 두상으로 묘사된다. 특히 정읍 황토현 전적의 장군의 동상은, 친일 조각가의 작품이라는 문제와는 별개로 고증 상 많은 논란이 제기되어 왔다.
1895년 2월 28일 일본 대판매일 사진사 무라까마가 찍은, 들것에 실려 재판장으로 가는 맨 상투의 죄수 모습이 전봉준 장군의 유일한 사진이다. (최근, 거의 동시에 찍은 또 다른 사진이 발견되었지만)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 전봉준 장군의 맨 상투 두상은 표준 영정이 되어있다.
당시에 감옥의 죄수는 상투를 풀고 칼을 씌우는 것이 상례다. 갑오개혁으로 수형 제도가 개선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대역죄인의 두발 자유화는 상상할 수 없다.
사진에서 보는 맨 상투, 그것은 정상적인 상투가 아니라, 사진을 찍기 위하여, 얼굴을 가리고 있는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을 묶어 정수리 위에 감아, 임시로 핀(동곳)을 꼽아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천군만마를 호령하던 전봉준 장군이 전투 지휘 시에도 과연 그와 같은, 망건도 두건도 두르지 않은 맨 상투의 모습이었을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마 위를 동여매지 않은 채 정수리에 머리카락을 모아 묶어놓기만 하면 머리카락은 풀어지기 마련이다. 그것도 격렬한 동작을 요구하는 전투 중에는.
시대를 주름잡았던 영웅의 모습을 우리는 오늘, 죄수의 알굴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장군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헌은 찾기가 어렵다.
몇 가지 추정해 불 수 있는 단서를 찾는다면,

1. 함평에서 혁명군의 진군 모습[오하기문, 황현]
2. 전라감사 김학진과의 담판을 위하여 전라감영에 들어서는 장군의 모습[갑오약력, 정석모]
3. 삼베 옷에 백립(흰갓)을 썼다는 기록(부친 복상 중) [천도교 창건사, 이돈화]
4. 나주로 진군하는 혁명군의 군세[동학당에 관한 휘보, 일본 부산총영사관 실전의문(室田義文)]
5. 우금치 전투 시 전봉준 장군[경리청 영관 홍운섭] 등이다.

1의 기록을 보면
“평민 한 명이 14세쯤 되는 아이를(어깨에) 올려놓고 군대 앞에 섰다. 아이가 작은 남색 깃발을 쥐고 마치 지휘하듯 하니, 모든 농민군이 그 뒤를 따랐다. 앞에 피리를 부는 자가 섰고 다음은 仁義 자를 쓴 깃발 한 쌍, 다음은 禮智자 깃발 한 쌍, 다음은 백기 두 개가 뒤따랐는데, 하나는 보제(普濟) 하나는 安民彰德, 황색기에 普濟衆生이라고 썼고 나머지 깃발에는 각각 읍 명을 표시했다. 그다음에는 갑옷 입고 말을 타고 칼춤을 추는 자가 따르고 그 뒤를 칼을 잡고 걷는 자 4-5쌍, 큰 나팔을 불고 붉은 단령을 입은 자 두 명, 피리를 부는 자 두 명이 뒤따랐다. 다음에 한 사람이 절풍모(折風帽)를 쓰고 우산을 들고 나귀를 타고 가는데 이 사람 주위에 같은 모습을 한 여섯 명이 말을 타고 뒤따랐다. 그다음에는 만여 명의 총 가진 자가 두 줄로 가는데 제각기 오색 두건을 둘렀다. 총 가진 자의 뒤를 죽창을 쥔 자가 따랐다. 이들은 모두 앞에 아이의 남색 깃발이 가리키는 대로 하였다.” [오하기문, 황현]
이 위풍당당한 혁명군의 진군 행렬에서 누가 전봉준 장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갑옷 입고 말을 타고 칼춤을 추는 인물, 아니면 절풍모를 쓰고 우산을 들고 나귀를 탄 사람일 것이다. 즉, 전봉준 장군은 맨 상투가 아닌 갑주를 입었거나 절풍모를 썼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중에 전봉준 장군이 분명히 있을 것이며, 맨 상투의 죄수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

2의 기록은
“6월 관찰사는 전봉준을 전주 감영으로 초청했는데 이때, 감영군은 총과 창을 가지고 좌우에 정렬했다. 전봉준은 삼배 옷에 큰 갓을 쓰고 으젓하게 들어오는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갑오약력, 정석모]
역시 맨 상투의 모습은 아니다.

3의 기록은
 황룡천 전투 전후의 전봉준 장군의 묘사 : “전봉준 장군 자신은 머리에 백립을 쓰고 몸에 백의(父喪중)를 입었으니 몸은 비록 칠척(七尺)이 되지 못하나 눈에 형광이 있고..” [천도교 창건사, 이돈화)

4의 기록은 나주로 진군하는 혁명군의 군세로,
4월 21일자에는 "무안에서 보낸 보고를 접하니 본현 삼내면 동학도 7∼8천 명이 절반은 말을 타고 절반은 걸어서 몸에는 갑주(甲胄)를 입고 각기 긴 창과 큰 칼을 지니고 18일에 들어와 하룻밤을 자고 나주로 향했다."고 하였다. [동학당에 관한 휘보, 일본 부산총영사관 실전의문(室田義文)]
혁명군의 절반인 3, 4천 명이 말을 타고 갑옷과 투구를 썼다는 것인데, 장군은 과연 맨 상투였을까?

5의 기록은
 우금치 전투 시의 장군 : “전봉준은 붉은 덮개를 씌운 큰 가마를 타고 기를 펄럭이며 뿔 나팔을 불며 우금치 계곡으로 들어와 공격을 지휘했다.” [경리청 영관 홍운섭]
장군은 거병 이래 말을(백마) 타고 지휘했는데 산이 너무 가파른 탓인지, 혹은 자신감을 보이고 부대의 사기를 위하여서인지 표적이 되는 붉은 가마를 탔다.

장군의 옛 처형장 자리, 서울 종로에 세워진, 동 저고리, 맨 상투의 동상이야 장군의 마지막 모습이니 문제 될 것이 없지만, 거병 이후 전투 지휘 모습은 반드시 죄수가 아닌 장군의 모습으로 복권되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이 한때 죄수였다는 이유로 죄수의 모습으로 동상을 세울 수 없는 이유와 같다.
앞으로 황토현 전적에 조성될 시설물에는 백마 타고 갑주 입은, 진정한 장군의 모습이 재현되기를 기대한다.
이미 맨 상투의 모습으로 전봉준 장군의 이미지가 오래 굳어 있는 상황에서, 마상의 갑주 입은 장군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잘못된 역사적 사실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손만대에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할 위대한 동학농민혁명의 위상을 위해서도, 장군이라는 호칭에 걸맞은 무인의 풍모를 복원하는 것은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확한 장군이 모습은 더 많은 고증 확인이 필요하지만, 적어도 죄수의 모습만은 안 된다.
 [동학농민 혁명군의 후손 유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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