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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들…  |  16-10-15  |  3,091
사발통문 다시보기
   사발통문 다시보기.hwp (3.7M) [30] DATE : 2016-10-15 21:38:37
사발통문 다시보기
                         
  1. 사바통문 발견 경위
  정읍시 덕천면 소재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 오면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중 가장 낯익은 고문서 하나를 볼 수 있다. 바로 중, 고등, 대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 널리 알려진 사발통문(沙鉢通文) 원본이다.
  동학혁명 기념재단에서는 사발통문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 주요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으며, 금년 기획전시 주제를 “반역의 역사를 넘어 세계의 역사로” 정하고 세계유산 등재를 기원하는 마음을 모아 등재 대상 주요 기록물을 11월 10일까지 틀별 전시하고 있다. 혁명 발발 후 122년 중 그  2/3기간인 80년 간은 동학난이라는 반역의 역사였다. 이제 혁명의 역사로, 세계 인류가 공유하는 세계사적 가치로 격상하는데 세계기록유산 등재의 의의가 있다.  귀중한 문헌 원본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유명한 사발통문 원본도 볼 수 있다.
  사발통문은 제1주모자가 누구인지 모르게, 작성자의 연명을 사발모양으로 둥글게 작성한 통문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전파한다는 四發通文의 뜻도 있다.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이 계속되자, 전봉준 등 동학 교단의 지도자들 20명은 무력항쟁을 통한 혁명을 계획하고 그해 11월에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의 집에 모여 4대 결의를 정하고 통문을 각 마을 집강들에게 보냈던 것이다.
  1968년 여산 송씨 족보에서 발견된 사발통문을 후손인 송기태에 의하여 공개 되었으며, 서명자 후손들은 1969년 주산마을 어귀에 동학혁명 모의탑을 세우고 영구안치를 위하여 탑 속에 사발통문을 묻어두었다가 학계의 연구 필요에 의하여 1970년 꺼내어, 참여자 송국섭의 손자 송종수 옹(90여세)이 소장하고 있다가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에 기탁된 것이다.     

 2. 사발통문의 의의  및  세계기록유산으로서의 가치
  1) 혁명의 발단이 조병갑의 탐학에 의하여 우발적으로 일어났으며 최초의 고부 봉기는 혁명이 아닌 민란이라고 본 우발설과 고부 민란설을 뒤엎는 문헌이다. 조병갑 군수의 수탈이라는 우연성 이면에는 19세기 말 조선사회가 안고 있는 봉건체제의 모순 속에서 혁명의 필연성이 대두되고 있었고 사발통문 혁명계획에 의하여 사전 치밀한 준비와 동학조직을 통한 전국적인 봉기의 프로그램이 진행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3) 전주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장 진격한다는 계획은 전국적 동학 조직을 통한 봉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는 점에서 이미 동학의 남접 조직을 중심으로 전면적인 혁명 계획이 수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세계기록유산의 선정요건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와 진정성, 완전성과 보존 능력을 충족하는 기록물이여야 하는데, 혁명주도 세력이 작성한 독특한 형태의 혁명계획과 통문은 세계에서 사발통문이 유일하고, 민중혁명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는 전 인류가 공유할 수 있는 가치이기에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며, 그 진정성과 완전성, 그리고 정부산하 기념재단이 관리를 담당함으로써 보존능력 또한 우수하다 할 것이다.

 3. 사발통문에 대한 논란과 검토
  사발통문 출현 이래 고부혁명이 아닌 고부민란으로 보는 일부 연구자들은 사발통문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그 사료적 가치는 인정하면서도 1) 20명의 필체가 동일하다는 것. 3) 정확한 날짜가 없고 끝 부분이 잘려져 나가 격문의 내용 등을 알 수 없다는 것 3) 당시에 쓴 것이 아니고 후일에 혁명의 전개 과정을 겪은 이가 회고하여 쓴 것이라는 견해로 사발통문의 진정성에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당시에 작성 한 것이라는 것은 사발통문 자체가 말해주고 있다.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급하게 접은 흔적이 보이는데, 이것은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급히 접어 전달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후일에 여유롭게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또 당시 고부 군에 264개의 마을이 있어, 처음 작성한 초본 사발통문은 각각 참여자 자필로 서명했겠지만 200여장 이상을 옮겨 쓰면서는 한사람이 동일 필체로 썼을 것이다. 고 임두영(주산리 거주)씨는 사발통문은 서명자 글씨가 다 다른 사발통문 초본을 보았다고 증언했는데 현재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현 사발통문은 당시에 옮겨 쓴 것 중 하나로 보인다.
  사발통문 참여자 20명의 앉은 위치는 최고령자(66세)인 집주인 송두호와 제1장두 전봉준이 방 아랫목 중앙에, 제2 장두 정종혁과 제2 고령자 송인호(53세)가 그 좌우에 좌정하고 있어 사발통문의 사실적 신뢰성을 더해준다. 
                접은 선  (사발통문 그림은 첨부파일 참조)
 
4. 제2의 사발통문
  사발통문 서명자 중 한 사람인 송주성의 차남인 송재섭(1889)이 1954(66세)년에 펜으로 쓴 필사본, “甲午東學革命亂과 全琫準將軍實記”가 2001년에 소개 되었는데 기존 사발통문에서 잘려나간 전문과 飛檄, 通文이 완벽하게 실려 있어 혁명의 성격과 기존사발통문의 의문을 풀어주고 기존 사발통문의 진정성을 확신하게 한다. 참여자는 15명으로 기존 사발통문의 참여자 20명 중 5명이 빠져 있다. 어떤 기록이나 사발통문 원본을 보고 기록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가슴을 울리는 호소력을 갖는 명문장으로 되어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飛檄
今之爲臣은 不思報國하고 徒竊綠位하며 掩蔽聰明하고 阿意諂容이라 忠諫之士을 謂之妖言하고 正直之人을 謂之匪徒하여  內無報國之才하고 外多虐民之官이라 人民之心은 日益逾變 入無圖生之業하고 出無保軀之策이라 虐政이 日肆에 怨聲이 相屬이로다. 自公卿以下로 至方伯守令에 不念國家之危殆하고 徒竊肥己潤家之計와 銓選之門은 視作生貨之路요 應試之場은 擧作交易之市라. 許多貨賂 不納王庫하고 反充私藏이라 國有積累之債라도 不念圖報요 驕侈淫昵 無所畏忌라 八路魚肉에 萬民塗炭이라 民爲國本이니 本削則國殘이라 吾徒는 雖草野遺民이나 食君之土하고 服君之衣하며 不可坐視 國家之危亡이라 以報公以輔國安民으로 爲死生之誓라.
癸巳仲冬下旬 罪人 全琫準 書
 
 通文
右文爲通諭事 無他라 大廈將傾 此將奈何오 坐而待之可乎아 扶而救之可乎아 奈若何오 當此時期하야 海內同胞의 總力으로 以하아 撑而擎之코저하와 血淚를 灑하며 滿天下同胞에게 衷心으로써 訴하노라.
吾儕飮恨忍痛이 己爲歲積 悲塞哽인함은 必無贅論이어니와 今不可忍일새 玆敢烽火를 擧하야 其哀痛切迫之情을 天下에 大告하는 同時에 義旗를 揮하야 蒼生을 濁浪之中에서 救濟하고 鼓를 鳴하야 써 滿朝의 奸臣賊子를 驅除하며 貪官汚吏를 擊懲하고 進하여 써倭를 逐하고 洋을 斥하야 국가를 萬年盤石의 上에 確立코자 하오니 惟我道人은 勿論이요 一般同胞兄弟도 本年十一月二十日을 期하야 古阜馬項市로 無漏內應하라 若不應者 有하면 梟首하리라
癸巳 仲冬  月    日
全琫準, 宋斗浩, 鄭鍾赫, 宋大和, 金道三, 宋柱玉, 宋柱晟, 黃洪模, 黃贊五, 宋寅浩, 崔興烈, 李成夏, 崔景善, 金應七 黃彩五

 各里 里執綱 座下
右와 如한 檄文이 四方에 飛傳하니 勿論이 鼎沸하고 人心이 忷忷하얐다.
每日 亂亡을 謳歌하던 民衆들은 處處에 모여서 말하되, ‘낫네 낫서 亂離가 낫서, 에이 참 잘되얏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百姓이 한 사람이나 남아잇겟나’ 하며 下回만 기다리더라.
이때에 道人들은 先後策을 討議하기 위하여, 宋斗浩家에 都所를 定하고 每日 雲集하야 次序를 따라 條項을 定하니 左와 如하다.
一, 一將頭에 全琫準
一, 二將頭에 鄭鍾赫
一, 三將頭에 金道三
一, 參謀에 宋大和
一, 中軍에 黃洪模
一, 火砲將에 金應七
 (참고문헌 : 조광환, 「사발통문에 대한 제 고찰」, 『황토현』,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2010)

5. 맺는 말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라고 한다.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영문으로는 세계의 기억(Memory of the world)이라고 한다. 전 인류가 공유하며 영구히 보존하고 계승해야할 세계사적 가치의 기억일 것이다.
  110년이 되어서야 참여자 명예회복특별법이 마련되어 참여자가 역적의 굴레를 벗었지만, 1960년대 말까지 80여 년간 혁명은 망각해야 할 반란의 역사였으며 대화중단의 역사였다.
  후손의 한 사람인 필자는 어릴 때 조부나 부친으로부터 집안 선조들의 양반 자랑은 싫증나도록 들었으나 동학군 접주 화포장이었던 증조부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고 할머니로부터 유 대장 아들과 며느리를 잡으려고 추격하는 경군을 피하여 도망 다닌 이야기를 별 흥미 없이 들곤 했는데 그 때 잘 듣지 않는 것이 지금은 후회되기도 한다. 동학군 역적의 후손임을 치욕으로 알았던 시절에 부친과 조부는 내가 그것을 아는 것이 두려우셨을 것이다. 30 여만 명의 희생자 중에서 특별법에 의하여 후손이 증거 첨부, 신청하여 참여자로 인정받은 농민군의 숫자는 겨우 498명, 철저한 망각과 단절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저 찢어진 종이쪽지, 사발통문 한 장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무엇일까? 사발통문처럼 찢어지고 도말되고 왜곡되고 망각된 혁명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라는 경고를 주는 것 같다. 그리고 역사의 준엄함과 소중함을 일깨워 주며, 바로 서는 역사, 올바른 역사의 기억을 흐트러지지 않게 지킬 것을 당부하는 것 같다.
  이제 반란의 역사에서 혁명의 역사, 세계의 역사로 당당히 격상 될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의 세계기록 유산 등재의 의미는 실로 막중한 것으로 모두 다 같이 등재 추진에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유태길 (정읍 동학농민군 유족회 부회장,  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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