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사업회자료실 가보세가보세              


사발통문
1893년 11월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송두호의 집에서 전봉준 등 20여명이 모여 농민항쟁을 계획하고 그 결의 내용과 아울러 사발을 엎어 놓은 모양으로 서명하여 각리의 집강에게 돌렸다 하여 일명 사발통문이라 한다. 본문과 뒷부분이 떨어져 나가 그 전부를 밝힐 수는 없지만 1968년 12월 세상에 공개되면서 고부농민봉기가 우발적 감정의 폭발이 아닌 철저한 혁명적 거사 계획에서 치밀하게 진행되었음을 알수 있다.
고부관아터
현재 전북 정읍시 고부면 소재지 내에 위치한 고부초등학교가 고부관아가 있었던 곳이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고부는 지리적으로 호남의 삼신산이라 불리는 두승산이 있고 고창 방장산에서 발원하는 눌지천이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눌지, 팔왕, 백산평야와 배들, 수금, 달천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당시 서해안의 부안 땅을 관할하고 있어 해산물 또한 풍부한 천혜의 낙토라 이를 만한 고을이었다. 그리하여 백제때부터 남방경영의 중심지가 되었고 오늘날 이름인 고부로 일컬어진 것은 신라통일 후 경덕왕 때(767)부터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전라도 서부지역의 정치, 군사의 중심지이자 서해안의 요진으로 내려오다가 1914년 일제시대때 정읍군으로 폐합되어 백산면은 부안군으로 부안면은 고창군으로 각기 편입되어 동학농민혁명 이후 농민군과 함께 쇠락을 같이한 고을이다.
전봉준장군 단비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 전봉준 고택에서 500여미터 떨어져 있는 소나무 숲에 위치한 이 비는 천안전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비문 앞면에는 태극문양과 갑오 민주 창의 통수 천안 전공 봉준 지단(甲午民主倡義統首天安全公琫準之壇)이라 새겨져 있다.
전봉준 고택
녹두장군 전봉준의 유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 집은 1894년 고부농민봉기 이후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불타버렸으나 다시 보수하여 사적 제283호로 지정하여 보존되고 있다. 오늘날의 지명은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이지만 당시에는 고부군 궁동면이었다. 죽창문의 방 3개와 부엌이 딸린 본채가 있고 마당가에는 변소와 헛간으로 쓰이는 아래채가 따로 있는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집으로 전봉준 장군이 고부농민봉기가 있기 5-6년 전에 이사와 훈장생활을 하다 고부농민봉기를 일으킬 때까지 거주하였던 집이다.
말목장터
1894년 1월 10일 밤 농민군이(고부농민봉기) 예동마을에 최초로 집결하여 고부관아로 진격한 곳으로 고부 점령 후 농민군의 진지로 되었다. 만석보에서 서쪽으로 약 2km가량 떨어져 있으며 오늘날 지명으로는 전북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이다. 당시에 군내의 중심지로 전라도 일대에서는 손꼽히는 농산물 거래장이 섰다고 하는데 일제시대까지 내려오다가 없어졌다고 함. 지금의 면사무소 앞에는 전봉준 장군이 집결한 농민들에게 일장연설을 하고 기대어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아름드리 감나무(2003년 태풍때 쓰러져 황토현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가 있다.
만석보와 배들평야
전북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에 위치한 만석보는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쌓았다. 주변에는 배들평(이평)이라는 비옥한 넓은 들이 쳘쳐져 있어 어느 지역보다도 넓은 들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굶주리고 착취당한 당시의 농민들의 분노가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 작용을 하였다. 즉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새보를 막고 보의 윗논은 1마지기에 2말, 아랫논은 1말씩 징수하여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1893년 11월, 12월 두 차례나 수십명의 농민들이 보세감면을 요청했다가 도리어 체포 구금되어 격분한 농민들에 의해 고부농민봉기를 촉발시켰으며 보는 당시에 파괴되어 현재는 보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1973년에 세운 유지비만 남아 있다.
백산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고부군 백산면이었지만 1914년 부안군으로 편입되어 현재 전북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로 불리고 있다. 백산은 해발 47미터 정도의 야트막한 야산이지만 부안, 정읍, 신태인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주변 일대가 모두 넓은 평야로 이루어져 주위가 한눈에 들어오며 뒤편으로는 동진강이 흘러 천연의 요새이다. 1894년 3월 21일(25일 설도 있음) 각지에서 모여든 농민들로 본격적인 농민군 부대를 편성하고 호남창의 대장소의 이름으로 격문과 농민군 행동강령을 발표했던 곳이다. 원래는 흰뫼산(심미산)으로 불리웠으나 당시 온산이 흰옷에 죽창을 든 농민군들로 뒤덮여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현재 백산의 정상에는 1989년 11월에 건립한 ‘동학혁명백산창의비’가 서 있다.
격문
우리가 의(義)을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 내몰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이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키지 못하리라.
갑오동학혁명기념탑
현재 황토재 마루에는 '제폭구민, 보국안민' 농민군이 내걸었던 구호를 새겨놓은 최초의 기념탑인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이 있는데 뒷면에는 새야새야 파랑새야 노래와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보리 노래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갑오년(1894년), 을미년(1895년), 병신년(1896년)으로 이어지는 당시의 민중들의 염원(이 때를 놓치면 영영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을 보여주는 구전민요이다. 황토재 주변에는 전봉준 장군 부인의 묘지가 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태인
원평전투에서 패한 전봉준 등은 태인으로 후퇴하여 김문행, 문행민 등과 함께 농민군 5천여명을 거느리고 1894년 11월 27일 태인의 성황산, 한가산, 도이산에 진을 쳤다. 이에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이 한가산과 도이산을 공격하자 농민군은 성황산에 집결하여 대적하였으나 우세한 화력앞에 무릎을 꿇은 전봉준 장군의 마지막 격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