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은 고부농민봉기, 3월봉기, 집강소 통치시기, 9월 재봉기 등 4단계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1단계는 1894년 1월 10일 일어난 고부농민봉기 단계이다. 고부농민봉기는 1월 10일 전봉준(全琫準), 김도삼(金道三), 정익서(鄭益瑞) 등의 주도로 고부 농민들이 봉기하여 탐관오리로서 온갖 폭정을 저지른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을 몰아내고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어 버렸으며 2달여에 걸쳐 봉기의 지속과 확대를 준비한 뒤 고부 백산으로 합류하고자 했던 사건을 말한다.
고부농민봉기는 1892년과 1893년에 동학교단의 주도 하에 금구에서 있었던 교조신원운동과 고부지방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1893년 11월 사발통문(沙鉢通文) 거사 계획과 깊은 관련을 가짐으로써 동학교단의 움직임과 연속성을 가진다는 점과 1월 10일에 시작하여 3월 13일까지 무려 두 달간이나 계속되는 지속성을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전봉준을 비롯한 강력한 지도부가 중심이 되어 농민들을 민군(民軍)으로 조직하고 무장하였다는 점에서 종전의 농민봉기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고부농민봉기 단계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특징은 고부군의 사회·경제적 처지와 고부 일대에 널리 포교되었던 동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하겠다.
2단계는 새로 부임한 고부 군수 박원명의 설득과 회유에 농민대중이 빠져나가자 1894년 3월 13일 잔여 농민군을 해산하고 무장(茂長)으로 넘어가 손화중을 설득하여 그 해 3월 25일경 전라·충청 각지에서 봉기한 백산봉기 단계이다.
고부농민들이 해산한 이후 전봉준은 전라도 무장에서 사전에 거사계획을 함께 준비한 손화중과 함께 영광, 무장 등 남도 일대 농민군을 이끌고 일어섰으며, 서장옥은 금산 일대에서, 김개남은 태인에서, 김덕명은 금구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3월 25일경(21일 설도 있음)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여기서 각지에서 참가한 농민군으로 진영을 확대 개편하였으며 호남창의대장소 이름으로 격문을 발표하여 민중의 봉기와 호응을 촉구하였고, 4대 명의와 12개조 기율을 발표하여 군율을 정하였다.
그 해 4월 7일 황토재에서 전라감영 군을 격파하고 전라도 서남해안으로 기수를 돌려 흥덕, 고창 , 무장, 영광, 함평을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그 해 4월 23일 장성 황룡촌에서는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京軍)을 무찔렀다.
그 해 4월 27일에는 호남의 수부(首府)인 전주성을 점령하고 그 해 5월 7일 경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체결하고 다음날 해산하였다. 이 전주화약을 계기로 동학농민군은 자기들의 고을로 돌아가 폐정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3단계는 동학농민군들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고을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하는 시기인 집강소 통치시기이다.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활동은 새 전라감사로 부임한 김학진(金鶴鎭)과 전봉준 사이에 담판이 이루어지면서 가속화되어 몇 개 고을별로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며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군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고을에서는 집강소 설치가 수월했을 뿐만 아니라 과감한 폐정개혁 활동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나주. 운봉. 순창의 경우는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는 향리와 지방 유생 및 지방 포군으로 구성된 수성군(守城軍)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등 집강소 설치와 폐정개혁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한편 전라도 각지를 돌며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활동을 독려하던 전봉준은 그 해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라감사 김학진의 협조를 얻어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재기포(再起捕)를 준비하게 된다.
재 기포는 그 해 9월 12일경 전라도 삼례에서 이루어지고 이로써 집강소 통치기가 사실상 끝나고 동학농민혁명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4단계는 전봉준이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재기하는 9월 12일부터 그 해 12월 체포되기까지이다.
제2차 봉기를 위하여 전봉준은 9월초부터 삼례를 거점으로 하여 동학농민군을 재조직하고 10월에는 서울을 향해 북상을 시작했다.
이 때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경군과 일본군의 연합군대가 세 길로 나누어 내려오기 시작하자 전국 각 지역에서는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잇따랐다.
특히 1차 봉기 단계에서 봉기하지 않았던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북부지방에서도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반침략항쟁의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 봉기했으며, 최시형의 영향 아래에 있던 동학 상층지도자들도 휘하 교도들을 이끌고 봉기하여 10월 15일경에 논산의 전봉준과 합류했다.
이들 연합군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고, 서울로부터 내려온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공주 우금치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했다.
그리하여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1차 대접전이 있었고,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2차 우금재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 두 차례의 큰 싸움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선전분투했지만 절대적인 무기의 열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동학농민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의 패배로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졌지만, 반외세의 항쟁은 계속되어 11월 15일경 논산 황화대에서, 11월 25일 금구 원평 구미란에서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원평전투를 고비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재기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피신하였지만 관군과 일본군에 의한 완전 토벌작전에 밀려 대부분 체포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되고 난 뒤 봉기의 대열에 참가했던 지도자들과 민중들은 지방 유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보군과 관군, 그리고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잔여세력들은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일어난 의병의 대열에 합류하여 항일민족운동에 또 다시 헌신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