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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 1855년 전북 고창군 죽림리 당촌에서 아버지 전창혁(全彰赫亨鎬) 어머니 광산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안전씨 족보에 의하면 명(明)은 영준(永準)이요, 봉준(琫準)은 초명(初名?兒名)이며 녹두(綠豆)는 그 체구가 작아서 불리워진 별호이다. 그는 봉건체제에 짓밟히고 있는 민권을 제창하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는 민족을 구하려 민중을 이끌고 무명 동학접주로 갑오농민혁명을 지도한 혁명가요, 사상가였다.

전봉준은 불요불굴의 의지력과 탁월한 영도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조선 말기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대개는 조정에서 안핵사(按?使)를 보내면 평정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고부(古阜)의 전봉준은 그렇지가 않았다. 정월봉기(고부봉기) 후 이용태 안핵사가 역졸(포졸)을 거느리고 내려와 뿌리를 뽑겠다고 서슬이 시퍼렇지만, 이때 전봉준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무장(茂長)의 손화중과 손을 잡고 마침내 삼월봉기(백산봉기)을 일으켰다. 이어 9월에는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여 다시 구월봉기(삼례봉기)를 일으켜 서울로 진격을 하다가 10월 23일 공주에서 15일 동안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면서 저항하였으나 패하였으며,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전투에서도 (전봉준 장군의 주력부대로서는) 패하여 결국은 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갔다.

갑오농민혁명 당시 삼남지방 각지에서 많은 접주들이 항거하여 봉기하였으나 전봉준 장군처럼 호남의 5천 군대를 거느리고 일사불란의 대오로 일본군에 최후까지 혈전을 벌인 영도인물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청도 관찰사 박제순은 9월 봉기 후 전붕준장군이 논산(論山)으로 진격하여 공주감영이 위급해지자 교주 최시형이 거느리는 북접의 10만 대군을 막는 일보다도 호남의 전봉준을 방어하는 일이 더 화급하다고 천안에 머물고 있는 선봉장 이규태에게 급전을 보냈으니 이에 전봉준 장군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공주싸움에서 패한 후, 11월 27일 태인싸움을 최후로 수행 몇몇과 11월 29일 입암산성(笠巖山城)으로 들어가 밤을 지냈다. 때마침 남하(南下)하는 일본군 모리오 부대와 이규태의 관군이 천원(川原.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에서 추격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30일 다시 산성에서 동쪽으로 20리 거리에 있는 백양사(白羊寺)로 이동했다. 백양사에서 일박하고 김개남(金開南) 장군이 은신하고 있는 태인 산내면 종성리(정읍시 산내면 종성리)로 가는 도중, 다음날 해질무렵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왕년의 동지 김경천을 찾았다.

김경천은 전봉준을 맞이해 놓고 전주감영 퇴교(退校)로 이웃에 살고 있는 한신현에게 밀고했다. 밀고를 받은 한신현은 김영철, 정창욱 등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전봉준을 포위했다. 전봉준 장군은 위기에 처하자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 다리를 얻어맞고 붙잡히고 말았으니 1894년 12월 2일이었다. 순창을 거쳐 담양의 일본군에게 인계되어 나주, 전주를 경유하여 12월 18일 서울에 도착되었는데 동학군들을 경계하여 일본 영사관 감방에 수감하였다.

전봉준 장군은 다음해 2월 9일, 2월 11일, 2월 19일, 3월 7일, 3월 10일 5차에 걸쳐 일본 영사의 심문을 받고 3월 30일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환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향년 41세였다.

그는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나는 바른 길을 걷고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 반역죄를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라고 개탄했다. 그는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아 한발자국도 옮겨 놓을 수가 없어 아리(衙吏)에 앉겨갔다.

그는 죽음에 다달아 다음 유시(遺詩)를 남겼다.

時來天地皆同力 때가 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運去英雄不自謀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도모할 수가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는 올바름일 뿐 나에게는 과실이 없나니
爲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리

한신현은 금천군수에 제수되고 상금은 한신현 1천냥, 김영철 300냥, 정창욱 200냥, 마을사람 9명 200냥 그리고 200냥은 피노리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민족의 위대한 혁명가요 사상가인 전봉준 장군의 행적은 몇몇 기록을 제외하고는 알 수 있는 바가 없으니 한때의 그릇된 사관(史觀)으로 음지에 묻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봉준 장군의 천추의 한이 담긴 녹두의 동요는 영원히 전해지고 있다.

1.
새야새야 파랑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 솔잎 프르다고
봄철인 줄 알지마라
백설이 휘날리면 먹을 것 없다.

전봉준이 빨리 서울로 진격하라는 풍자적이고, 참휘적인 동요.

2.
새야 새야 녹두새야
웃녘 새야 아랫녘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함박 쪽박 딱딱 후여

초가을 논두렁에서 새를 쫓는 시골아이들이 그냥 의미도 모르고 부르는 동요.(녹두의 동요는 각처에서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나 이 노래는전라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동요)

3.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전봉준 장군과 관련된 대표적 동요

출생지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논란이 있어왔지만, 현 전북 고창군 죽림리 당촌에서 출생하였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어려서 전주 구미리(현 완주군 봉동읍)로 옮겨 살다가 태인현 감산면 계룡리(현 정읍시 감곡면) 황새 마을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18세 때 20리 남짓되는 거리의 태인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현 정읍시 산외면)로 옮겨 살았다. 전봉준 장군이 일생동안 가장 오래 살았던 것이 지금실이다. 전봉준은 37세경 고부군 궁동면(현 정읍시 이평면) 양간다리로 이사했다가 조소리로 이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가계

족보와 산외면 동곡리에서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전봉준은 2남 2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그가 공초에서 가족이 6명이라고 밝힌 진술과도 부합되는 것이다. 장녀가 전옥례(1880-1970. 15세의 나이로 화를 피하여 진안 마이산으로 들어가 김옥련으로 이름을 고치고 금당사 공양주로 있다가 23세에 이영찬과 결혼했다. 1970년 갑오동학혁명기념문화제가 있은 뒤 비로소 그 동안의 사실을 밝힘으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현재 보존되고 있는 고택을 자기가 어려서 살었던 집이라고 증언했다.), 차녀(이름 未詳)의 외손녀 강금례 여사와 그녀의 아들 용규, 용현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전만길(全萬吉. 정읍시 북면 남산리)씨가 입대(入代)하였다. 1954년 천안전씨 종문에서 이평면 조소리에 사적비를 세웠다.
1981년 한국청년회의소가 전주 덕진공원에 추모비를 세웠다.

전봉준(全琫準)

장남(長男) - 용규(龍圭) - 無後
차남(次男) - 용현(龍鉉)
장녀(長女) - 전옥례(全玉禮)
이영찬(李永贊) - 이주석(李周錫) - 이희종(李熺鍾, 전북 진안군 부귀면 신정리)
차녀(次女) - ?
강장은(姜長殷) - 강금례(외손녀) - 박승규(朴承圭,전북 정읍 산외면 동곡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