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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민석(民錫) 자(字)는 자방(子邦. 방언) 본관은 인천으로 1838년 장흥군 용산면 묵촌에서 이중길(李重吉)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인천이씨 공도공의 후예로 명문출신일 뿐만 아니라 학덕을 겸비한 명망이 높은 인물로 알려졌다. 촌로들의 구전에 의하면 어느 해에 장흥지방에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다. 농민들은 생계를 이어나갈 계책조차 없는데도 진결세(陳結稅)를 바치라는 관아의 독촉이 성화였다. 여기에서 이방언은 장흥부사를 찾아가 감세를 진정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전라감영으로 가서 감사에게 진정하여 남상면의 결세를 감면했다고 한다.

그는 동학에 입도하여 장흥접주로 1894년 갑오농민혁명에 이인환, 강봉수, 강진의 김병태, 해남의 김도일, 영암의 신성 등과 3월 봉기에 참가하였다 한다. 그리고 이방언은 유명한 장성 황룡싸움의 「장태전법」의 주인공이었다.
공주 패전 후 장흥, 강진 지구에서 최후의 혈전을 벌였다. 전봉준은 11월 27일 태인싸움을 최후로 해산하였고, 이방언은 손화중, 최경선과 광주에서 역시 11월 27일 해산하고 장흥으로 돌아와 12월 4일 벽사역(碧沙驛)을 점령하고 다음 5일에는 장흥으로 쳐들어가 반항하는 장흥부(長興府)의 수성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7일에는 강진현을 점령하였으니 장흥, 강진 지구를 완전히 석권하였다. 13일 일본군과 관군의 총공격으로 남문싸움에서 패하여 장흥부를 일본군에게 빼앗기자 다시 탈환하려고 15일 장흥성을 포위했다. 그 후 반격작전을 전개했으나 때마침 일본군의 증원군이 도착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방언은 해산하지 않고 17일 죽천장(竹川場)에서 또 접전을 벌였으니 불굴의 혁명정신과 투지의 장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당시 세간에서는 이방언을 「관산 이대장」또는 「남도장군」, 손화중을「초산 손대장」이라 칭하였다.
이방언은 12월 25일 장흥에서 이두황에 피체되어 나주 일본군으로 넘겨져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다음해 3월 21일 무죄 석방의 판결을 받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대원군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한다. 그후 회령면 신기 이의원의 집에서 은신하다가 다시 피체되어 1895년 4월 25일 독자 성호와 함께 장흥 장대에서 최후를 마치니 향년 58세 였다.

이중길(李重吉) - 방언(邦彦) - 성호(聖浩) - 동수(東秀) - 종오(鍾午)
                                        - 女             - 정환(亭煥) - 종근(鍾勤)
                                                          - 계원(季遠) - 종칠(鍾七)
                                                                            - 종찬(鍾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