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사업회자료실 가보세가보세              


이름은 준상(峻相) 자는 덕명(德明) 호는 용계(龍溪) 본관은 언양(彦陽)으로 1845년 10월 27일 금구군 수류면 삼봉리 거야 마을에서 아버지 한기(漢驥)와 어머니 파평윤씨의 장자로 출생했다. 그 성장과정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풍신(風神)이 수려(秀麗)하고 담론(談論)이 유창했다고 한다.

전라도 동학의 중진 인물로 1892년 11월 1일에 있었던 교조신원 운동의 삼례대회에는 금구 지방의 교도들을 1만여명 소집하여 대화를 나눈적도 있었다.
고종 30년 3월 20일 전라감사로 제수된 김문현이 입시(入侍)하였을 때 전라도의 동학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는데 이때 왕은「호남에서 금구에 동학이 가장 많이 있다고 하는데 완영(전주)으로부터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먼저 그 소굴을 소탕하여 없애라!」라고 하였다.
김문현이 말하기를「30리 가량 떨어져 있는 금구 원평에는 과연 동학당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삼가 성교(聖敎.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금구 원평의 동학은 물론 김덕명포(包)의 동학을 지칭하는 것이니 그 세력이 얼마나 떨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김문현 감사는 30리 거리에 있는 금구 원평의 동학을 뿌리뽑지 못했던 것이다.

공주패전 후 전봉준과 원평으로 후퇴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11월 원평싸움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그리고 27일 태인싸움을 최후로 해산하고 향리로 돌아와 금산면 장흥리 안정사동에서 은신하다가 1895년 1월 1일(양력 1월 25일) 태인 수성군에 피체되었다.
1895년 3월 29일 법무아문(法務衙門) 권설재판소에서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향년 51세 였다.
원평 학수재 경내에 그의 추모비가 있다.

김한기(金漢驥) - 준상(峻相.덕명) - 홍구(洪九) - 병일(炳壹)
                       - 인상(寅相)                          - 병선(炳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