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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영주(永疇) 자는 기선(箕先) 본관은 도강(道康)이다. 1853년 9월 15일 정읍시(당시 태인현)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서 김대현의 세째아들로 출생했다. 개남이란 이름은 도강 김씨 족보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동학입교 후에 호칭된 별호인 것 같다.

태인은 이웃 금구의 원평과 더불어 호남에서 동학이 가장 기세를 떨친 곳이다. 그 가운데도 산외면 동곡리는 한때 전봉준이 살았던 곳으로 김개남의 출생지이면서, 이웃 고을에는 태인 주산리에 최경선, 원평에 김덕명과 김개남의 종형(從兄)인 김삼묵, 김문환 부자 등 동학의 중진 인물들이 주변에 있었던 곳이다.
전봉준 손화중과 아울러 농민혁명의 삼장두인 김개남은 그 가운데서도 강경파였다. 그는 남원에서 금산, 무주, 진안, 용담, 장수를 비롯하여 전라좌도를 호령하였고, 순천에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 대접주 김인배)를 설치하고 영남의 서남부지방까지 그 세를 떨쳤다. 9월 봉기의 북상에도 공주로 진격하는 전봉준과 달리 10월에 청주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북상 도중 전주에서 남원부사 이용헌과 고부군수 양필환을 체포했는데 굴복하지 않고 반항하자 일거에 이들을 참수하였다.
그는 11월 10일 청주를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에 패하여 진잠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태인 너듸마을(산내면 장금리) 매부인 서영기 집에 피신해 있다가 임병찬(면암 최익현의 제자로 그와 함께 을미의병에 참가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체포되어 단식으로 숨을 거둠)의 고발로 12월 1일 강화병방 황헌주에게 피체되어 전주로 이송되었다.
김개남은 태인 너듸마을의 매부인 서영기 집에 잠거해 있었는데 이웃 종송리 임병찬이 김종섭을 시켜 송두용 집으로 유인했다. 그것은 종송리는 회문산의 지맥으로 너듸마을 보다 험하고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으니 더욱 안전한 곳으로 와 있으라는 것이었다. 임병찬은 김개남을 유인해 놓고 김송현, 임병욱, 송도용을 시켜 전라도 관찰사 이도재에 고발하니 이도재는 황헌주로 하여금 강화병 80명을 거느리고 종송리에 와서 12월 1일 새벽 김개남을 잡아갔다.
다음 해 정월 정부에서는 논공행상으로 임병찬에 임실군수를 제수했으나 임병찬은 이를 사양했다. 정부는 임병찬 대신 황헌주를 임실군수로 제수했다.
전라관찰사 이도재는 김개남의 명성에 겁을 먹고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하는데 위험을 느껴 12월 3일 임의로 처형하고 그 머리는 서울로 이송하여 12월 25일 서소문 밖에 3일간 효시(梟示)했다가 다시 전주로 내려보내 효시케 했다. 향년 42세였다.
김개남에 대한 처형이 있은 후 일본공사와 조선정부 사이에는 한때 파문이 있었다.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1894년 12월 27일 조선정부에 서한을 보내 비도(농민군)의 처형은 신중을 기해야 하며 체포된 비도들은 정토대(征討隊. 일본군)에 넘겨 처리토록 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라관찰사가 김개남을 지방에서 단독으로 처형하자 일본공사는 조선정부에 전라감사를 불러들여 그 까닭을 엄중히 조사하여 알려주고 그에 대한 처분 문제는 공동으로 상의 하자고 요구해 왔다. 난처하게된 조선정부에서는 경위를 해명하고 그에 대한 처분을 할 것이니 불러들여 조사하는 것만은 재고하여 달라고 요청하여 간신히 이를 모면했다.

김대현(金大鉉) - 영백(永百)
                - 영수(永秀)
                - 영주(永疇. 개남) - 백술(伯述) - 환옥(煥鈺. 玉)
                - 女